배움의 플랫폼에 대한 단상, 20181231,스.
- 운문 산문 ‘합문’으로 문학형식은 어떤가요?
- “바라보기형태 연구Ⅲ 회화”와 새로운 문학 장르로 <합문>형식연구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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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형태연구Ⅲ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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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마음의 학이다”*
문의 어원에 꾸미는 의미가 있다. 만들고 그리고 생산한다는 의미가 문에는 있다. 흔히 문(文)을 문자만으로 생각하는데 학문이나 예술 등등이 문의 근원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옛 사람들은 ‘마음이 맡은 일이 생각’이라 말하고 또 ‘사지가 모두 하나이기 때문에 건드리면 느끼지 않음이 없다’* 생각하였다. 이는 학문이나 예술을 사람의 정신이 하는 하나의 일로 생각한 것이다. 또한 현대에 와서 ‘사람의 마음에 감정 따로 이성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연구나, ‘하나의 풍경화가 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이해는 왜 문이 마음의 학인지 알 수 있다.
학을 중시한 것은 바로 배움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다. 배움은 나로 보는 일로 나아닌 것을 나답게 여김 하는 아름다움이다. 엄밀한 문자 기호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나, 사는 일에 나름의 서사가 있다면 그 ‘마음의 문학’은 열려있다. 그 단적인 예로 2016년 노벨문학상에 포크록 가수인 “밥 딜런”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는 대중가요를 통해서도 자신의 시적 표현을 문학하였고 그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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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작의 내용물을 모음하며 작품발표 문제로 고민을 하였다. 창작과 보임은 하나이어야 하는데 창작과 보임이 하나인 형식이 요원하였다. 창출의 물음은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우연히 개인PC를 통해 문서작성도구를 이용하여 창작할 수 있는 형상편집 방법을 아이디어 할 수 있었다. 창작내용의 서사와 그 전시를 도화지에 스케치하듯 묘사 할 수 있는 새로운 창작방법이었다. 단순하지만 활명수같이 창출의 고민을 일거에 풀어주었다.
나는 위 창작방법을 문서작성의 리포트형식에만 의의를 두지 않고 새로운 문학형식의 창작으로 연구를 진전시켰다. 처음에는 “바람은 숲은 지나잖아”는 합문단편을 창작하고 그것을 ‘화문그림’으로 이름 하였다. 또 연이어 “파란 밤 아침”이란 합문단편을 창작하고 그것을 다시금 ‘산문그림’이라 이름 하였다. 그 후 몇 편의 합문단편을 다시금 창작하며 비로소 “합문(合文)”이라는 이름을 구하였다. ‘화문그림’ → ‘산문그림’ → ‘합문’으로 이름을 새롭게 개념하며 의도를 보다 구체화하였다.
문학은 문학과 비문학으로 운문과 산문 그리고 설명문이나 논문 기사나 광고문등으로 그 문예형식을 갖춤하고 있다. “합문”은 문학형식의 문학과 비문학의 에지를 구하고, 다양한 매체를 융합하여 예학의 이문을 구성할 수 있다. 미술로 순수와 응용과 사진과 영상 또, 전시 기획으로 미장센과 공간디자인 또, 통신으로 우편 등 스스로 나타내고자하는 이야기와 이미지와 창작정치의 공증을 융복합적양태를 기록하여두거나 서면이나 책자로 미디어 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구하고 기릴 수 있다.
“바람은 숲을 지나잖아”는 산문시로 운문 또 평론과 소설과 논설문과 자료문등 다양한 글쓰기 형식이 용합되어 있다. 또 그림과 사진 또 모든 예학의 에지를 보임할 수 있는 전시기획 등 실로 총합적으로 문예가 버무려 문서하고 있다. 나는 “바람은 숲을 지나잖아”창작하면서 이제부터 노벨문학상을 목표하자고 돈키호테 영혼과 접신도 해보았다. 그냥 웃음!
나는 ‘합문’의 가치를 – 창작물의 환유태의 - 창작혼의 소통에 두고 싶다. 나의 삶의 이야기 또 내 주변에서 보는 일상의 다큐의 사진.......내가 나를 연출하고 돌아보고 또 그것을 다양한 문예로 은유하고 확장할 수 있는 합문형식은 분명 창작에지의 최적의 소통 방법일 것이다. 이 소통은 작곡자의 교향곡Symphony의 작곡과 같이 성악 또는 기악의 종합음악을 악보만으로 소통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합문작품은 심포니의 악보와 같이 IT환경이나 공간예술로 그 창작물을 누구나 어떤 장소에서나 재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생각과 봄이 하나로 구성되고 다양한 전시공간에서 전시될 수 있는 것은 유기적인 봄의 과학으로 엄청난 것이다. 나는 합문의 문학형식은 단순한 아이디어나 실은 가공할 “배움의 플랫폼”을 형태하고 있다 생각한다.
우선, 나는 운문 산문 ‘합문’으로 문학형식은 어떤가요? 물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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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사회의 ICT 기술정보소통의 변화된 환경은 예학으로서 새로운 문학형식을 요청하고 있다. 일상의 개인용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놀라운 창작의 기제들을 갖춤하고 있고 무한한 창작의 가능성에 열려있다. 자신의 이야기의 표현의 방법을 소소한 서면작성기술만으로 창작할 수 있음은 실은 놀라운 사실이고 누구나 창작하는 기쁨을 도덕 할 수 있다. 실은 문학의 형식이 문자가 생겨 언어로 논어와 이야기를 서술하였듯 이와 같은 “합문”의 문학형식은 현대와 같은 기술정보사회에 문학형식의 새로운 장르로 그 의의가 크다 생각한다.
국회에서 국회의원이 삶에 필요한 법을 입법을 하듯 실은 나라에서 창작인은 ‘오현吾現’을 ‘진상眞象’하여야 한다. 국회의원이 입법에 충실하여야 하듯 창작인은 자신의 삶의 진솔한 이야기와 이미지와 헤아림을 길어 올려 일상의 사정을 나로 나타내는 일의 진상을 에지 하여 그 이문의 길에 문을 열어야 한다.
나는 나의 처지가 비상식적으로 곤궁하고 또 동료예술인들의 처우가 불편한 것은 아직 어린나라의 이해라 생각하고 싶다. 또한 “마농의 샘”과 같이 누군가 잘못된 이해를 가진 이가 있다 생각한다. 그것에 많은 말을 함은 어리석다. 사랑하는 나라가 선진화기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마음이고. 그 마음의 바로미터가 바로 예인들의 활동이니. 나는 그 활동을 바름 하는 것이 창작인으로 소임인 것만을 잊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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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움∙그림빚기∙더블음∙바라보기형태 연구∙오체화∙친구그림받아그리기∙풍경에 밑줄 긋기∙나라 봄(우편작업)∙“구상, 추상, ‘진상’”∙다성성∙나로 봄∙오현∙원근에서 상교∙합문∙문인수채화와 소묘∙배움으로 예술 등등의 새로운 조어나 개념을 나의 공부에서 창출하고 있다. 이는 나의 물음과 연구를 진척하기 위한 이성의 베이스캠프이나 이 개념들은 일반의 창의활동 이론과 형식에 직접적으로 쓰임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라 믿는다.
나는 2016년 전시를 통해 “바라보기형태 선”을 발표하였고 오늘 2018년 12월 31일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바라보기형태 회화를 내려놓는다. 특정전시장에서 전시형식을 빌리지는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분명 창작의 내용은 고민을 거듭한 임계점의 공부이고 또한 스스로 창의한 ‘합문’형식은 뜻있는 전시지원을 청하는 의뢰를 구하고 있다 생각한다.
‘벽암록’에는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다가올 오늘이라고 하여 오늘 최선을 다하는 일의 중요한 경계를 각성하게 한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가올 생활을 위한 생활양식으로 공부를 환금하지 못하고 이리 공부를 내려놓는 것은 나에게 내가 가하는 가슴 아픈 채찍이고, 과거로 가는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효이고, 생이 허락하는 한 공부하는 일의 지속적인 길을 열기 위한 작은 사람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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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히 이번 ‘바라보기형태연구Ⅲ 회화’를 개념하며,
∙‘오체화법’
∙‘원근에서상교’
∙‘문인수채,소묘화’
∙‘운문 산문 ‘합문’으로 문학형식
∙‘배움으로 미술’
등을 창의하였다.
또한 무엇보다 아직 더 가일 충 연구를 거듭하여 날을 새우고 쓰임을 넓혀야하는 개념이나
∙ 나로 봄
∙ 다성성과
∙ 예술형식론으로 “오현”과 “진상‘”의 개념 세움은 그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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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의 헤쳐 나감은 우선적으로 모든 동서양미술사와 근대현대 중국정부미술의 이해와 ‘아서 단토’의 예술철학의 학생 없음이나 ‘니꼴라 부리요’의 관계의 미학의 ‘값’의 이해 부족 등을 뒤집고 털어 치고 넘어서야 하였다. 또 서양철학과 종교들 또 우리네 어른들의 성리학 공부에도 태만하지 않고 “나와 아름다움”의 이해를 수없이 되물어야 하였다.
내가 작은 앎으로도 주저앉지 않고 나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눈”을 중시하고 배움과 봄의 시각으로 나름의 공부의 경향을 구하고 많은 지식들을 제이론 하는 거꾸로 걷는 일에 의의를 구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해본다. 현실문화의 패러다임자체 앞에 다른 나라말도 일천하고 우리말의 철자도 틀리는 이가 주눅 들지 않고 지속적으로 재촉하여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어쩌다 미술인이 되었고 이 길에서 살아야 하는 일이었으나. 나는 나의 길이 상식 밖으로 차디차고 어둔한 길이라는 사실의 처절한 각성에서 도리어 인류문명의 이문의 사정을 지형 할 수 있었다.
공부하는 길은 지식을 하나하나 씹어 삼키고 되새김질하는 완미의 지난한 시간이었다. 섣부르게 기분에 취하면 안 되었다. 당연히 그림이 그림을 부르는 작업물의 생산은 그 몰입에 자유스럽지 못하였다. 헌데 신기하게 그것이 도리어 소묘하고 생각들을 기록하며 문인소묘의 멋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하였으니. 커피를 마시며 그것을 그냥 그리고 또 그리워 그리며 그것에 이런저런 단상을 기록하며 배움의 품을 촉촉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운의 생함의 품이라 깨침하고 나름의 배움을 구하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실재로서 창작물로 ‘노란사과’ 시르지로 예술작품의 형식적 깊이를 더욱 구도하고 있다.
나는 나의 ‘배움으로 미술’ 작업들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미술창작 작업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작업내용으로 직접적으로 초중등대학의 학교교육현장에서 창의수업이나 프로젝트수업으로 쓰임 될 수 있는 내용들이라 생각한다. 어린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그림그리기 위해서는 그 지도 이론이 튼실한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나는 현재 그 실행 방편을 지속적으로 기술하고 가다듬고 있다.
나의 공부는 혼자 하는 공부이고 보니 많은 부족함이 있다. 또 여든이 넘은 부모에게 수도자도 아닌 이가 탁발하시라 공갈하고 중학생인 자녀에게도 스마트폰요금 좀 내달라고 도움을 청하니 아들로서 아빠로서 어처구니없는 사람이나, 이 길에 서있음도 생의연이라 믿고 이와 같은 고해(告解)로 배움 진력에 뜻 모음 한다.
나는 참 글을 힘들게 쓰는데 이상하게 어제 오늘 이리 그냥 쭉 쓰고 있다. 내가 좀 이상 한가...? 글은 항시 그렇듯 다시금 돌아보면 그림보다 더 부끄럽고 그냥 지옥이다. 허나 나는 내가 사람으로 해야 하는 효만을 생각하고 싶다. “죄송합니다. 엄마 미안해!”
이상할 수도 있는 논의들로 혼자 오버하는 미생의 미술학생일 수 있으나. 이 또한 ‘오현吾現’의 ‘진상眞象’으로 여김하고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큰 눈으로 보아주기 바람 하여 본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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