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인터넷 에서

원숙한 그림 같은 글

종희수 2008. 2. 17. 22:14

 

나는 뭔가 답답한 것이 있었다.

늘, 인터넷에 다음이 뜨고

끌려 들어간 개인 블로그의  앞뒤 없는 내용에 측은하여 댓글을 쓰고 스스로 부끄러움인지  그 사이트의 인용 - 문광훈 교수의 신문 글을 읽고는 오래 묵은  답답함이 더욱 채증이 생겨 평소 하지 않는 글을 또 달았다. 이리저리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김우창 교수의 글을 접할 수 있었다.


다 그래서야 쓰겠는가.  있어야 한다.

웃음이 나오고 이 양반 책을 좀 사봐야겠다.


그림 같은 글 아닌가. 참 편안한 그림이다.

단출하고 중후하다.


오늘은 어둠이 깊다.

 

 

 

[시대의 흐름에 서서]상상속의 집과 아파트

입력: 2006년 11월 22일 18:20:49
 
부동산값 폭등이 정치를 흔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자산, 부동산이 유통 시장 속에 떠다니게 된다는 것은 경제의 문제를 넘어 인간 생존의 근본을 불안하게 하는 일이다.

집은 간단히 말하면 물질의 자료로 만든 상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물질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는 ‘물질적 상상력’이 개입되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로는 집은 “인간 존재의 확실성을 집약하고” 땅 위에 “거주하는 기쁨을 압축하고 있는,” 원초적인 의미의 공간이다. (‘공간의 시학’) 누구에게나 그것은 바깥세상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의 피난처이다.

-타인을 배제하는 아파트구조-

집은 사람들의 근원적인 열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완전히 편한한 공간이 쉽게 발견될 수는 없다. 집이 있어도 보다 나은 집을 찾는 일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바슐라르의 설명으로는, “소유의 꿈을 실현해주며, 편리하고, 편하고, 건강하고, 건전하고, 좋은 모든 것을 구현하고 있는 집”-꿈의 집을 짓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특별한 관찰은 그런 집을 지어 보아도, 그 만족이 단기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영혼’의 숨은 갈구를 만족시켜주는 집은 한없이 복잡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러한 집의 원형은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난 집이다. 다른 집은 사람의 마음에 이 바탕 위에 겹쳐서 존재한다. 그러니까 집은 사람의 기억을 소장하고 있는 옛집이어야 한다. 그 집은 어머니의 모습과 겹친다. 물론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 때문에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나를 바깥세상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자의 원형이다. 세상에 대하여 닫혀 있는 것이면서도 집은 동시에 세상으로 이어져 있어야 한다. 상상속의 집에는 어두운 지하실이 있고 하늘과 빛에 가까운 다락이 있다. 집의 지하는 큰 나무처럼 땅으로 뿌리를 뻗고 다른 나무의 뿌리들과 얽혀 있다. 어두운 다락은 나의 무의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락은 내가 호젓하게 숨을 수도 있고 그로부터 세상을 내다볼 수도 있는 곳이고, 어쩌면 이성을 대표한다. 집에 이르는 데에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길가에는 벤치가 있고 갈림길이 있고, 들과 풀밭이 있다. 집은 이웃을 향하여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바슐라르가 인용하고 있는 한 심리학자는 프랑스의 아이들에게 집을 그리게 했더니, 현관문을 그리고 현관문의 손잡이를 크게 그렸다. 그것은 집이 밖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집의 구조와 실내 공간에 대한 한 연구에서 영국의 한 건축이론은 영국의 집 앞에 있게 마련인 작은 정원과 옥내의 응접실이-손님을 맞이하면서 가족도 거주하는 미국식 거실과 다르다-거주자와 이웃과 낯선 사람들이 섞이는 중간 지대가 된다는 것을 지적한 일이 있다.

이것은 프랑스적 가옥 구조와는 다른 것이다. 마당과 툇마루를 버린 한국의 아파트 구조는 그보다 더 철저하게 낯선 사람들을 사적 공간으로부터 배제하게 되어 있다. 철저하게 무리 속에 있으면서 철저하게 따로 있는 우리 심리의 표현일까?)

집의 상상에서 가장 원형적인 것은 집과 거대한 자연 또는 우주 공간과의 관계이다. 집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외부 공간의 광대무변함, 황량함, 그리고 그 무서운 힘에 대조되어 생각된다. 온 세상이 눈에 덮이는 날이나 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험악한 날씨에, 집은 평온한 피난처로서의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 문학작품에서 집의 의미를 요약하여 표현하는 이미지는 흔히 광활한 밤하늘 아래 외로이 불이 밝혀져 있는 작은 집이다. 이러한 이미지와 관련하여 생각할 것은 그 규모가 작다는 데에 이러한 집의 시적인 호소력이 있다는 점이다. 큰 집에 대한 소망도 사람의 꿈의 일부이지만, 보들레르는 “궁전에는 친밀의 공간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은자의 암자에는 ‘빈곤의 지극한 행복’이 있다.

-논밭 가운데의 어색한 풍경-

바슐라르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도 했지만, 그 스스로 ‘개울물과 강의 고장’이라고 설명한 바르쉬르오브라는 시골 태생으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곳에서 우체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파리의 주택에 대한 그의 인상은 매우 부정적이다. “파리에는 집이 없고 높이 쌓아 놓은 상자들이 있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곳의 집에는 “주변의 공간도 없고 수직의 느낌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의 평면에 채워 넣어져 있다. 파리의 집은, “그림이나 물건 그리고 옷장을 설치한, 또 하나의 옷장, 익숙한 동혈(洞穴), 기하학적 공간”일 뿐이다.

건물들이 높지만, 그것은 외면적인 높이이다. 고층 건물들은 뿌리가 없이 아스팔트 위에 고착되어 있다. “길은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는 파이프이다.” 모든 것이 기계적인 곳에 자연도 우주도 없는 것은 물론이다. 도시의 문제의 하나는 교통의 소음이다. 그것은 철학자의 병인 불면증을 깊어지게 한다. 그런 때에, 바슐라르는 소음을 파도 소리라고, 자신의 침대가 폭풍우 속에 바다를 항해하는 작은 배라고 상상함으로써 잠에 들 수 있었다.

서울이나 한국의 다른 도시 또는 논밭의 한 가운데에도 고층 아파트들이 서있는 한국의 경관에 비해서는 그래도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유지하고 있는 파리를 바슐라르는 이와 같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주거와 집에 대한 그의 기준은 대체로 초대형의 고층 건물이 등장하기 전의 시인과 작가의 상상력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추출해 낸 것이다. 다른 조건하의, 다른 환경에서 그 기준이 반드시 맞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존재의 깊이 그리고 삶의 모든 것에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사람들에게 집이 그렇게 귀중한 것일 수 없다. 어쨌든 집의 문제를 지나치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행복의 실체를 놓치는 일이다.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큰 실정 중의 하나는 전통적인 농가들을 없애고 농민들을 아파트에 집단 거주하게 한 것이었다. 소련을 비롯하여 공산주의 국가들의 거대 건축물들이 별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그것들이 자연스러운 공간적 조화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택 의미 교환가치로 바뀌어-

도시화는 환경의 추상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주택의 문제에서 추상적 계획에 의한 해결을 불가피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을 과장하는 것은 다른 요인들이 끼어들어 그런 경우가 많다. 공산주의의 건조물은 이념과 정치권력의 추상성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자본주의 도시의 (한국에서는 시골도 여기에 포함시켜야 하겠지만) 공간의 추상성은 돈의 논리에서 나온다. 규모의 경제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탐욕의 규모의 다른 이름이기 쉽다. 우리 도시의 부자연스러운 공간은 여러 요인들의 합작품이다. 단순한 생각의 정치가 사회문제에 대처하는 방안은 거대한 계획을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거대한 건설업의 힘을 통하여 수행된다. 많은 경우 공공기구와 정부가 설립한 공사도 정부 권력을 등에 업은 또 하나의 기업체가 된다. 거대 개발 계획의 최면술 속에서 주택에 대한 사람들의 꿈도 추상화된다. 지금 우리에게 집은 어디에 몇 평이고 몇 억의 가격이고 얼마의 이를 남기고 팔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주택의 의미가 이와 같이 철저하게 교환가치로 바뀐 예를 다른 곳에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경우로 보면, 바슐라르가 그리는 집은 그야말로 근거 없는 철학자의 몽상에 불과하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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